[2012.12.25] 성탄절 소회

도종환 | 2012.12.26 10:35 | 조회 2824

성탄절 새벽 밤새 내린 눈이 하얗게 세상을 덮었습니다.
순백의 침묵 속에 한 집 두 집 새벽등을 켜기 시작합니다.
엊그제 아침에도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다가 한바탕 울었습니다.
아침 한 시간의 제 기도와 명상은 “하느님 어제 하루 감사했습니다.”로 시작하고 “오늘 하루를 당신께 맡깁니다.”로 끝납니다. 그런데 “하느님!”하고 부르다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빈집에서 혼자 방바닥이 젖도록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저만 그렇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통곡하며 울었겠습니까? 제주의 화가 강아무개도 데굴데굴 구르며 울었다고 합니다. 저와 같이 일하는 안아무개는 어머니 돌아가시고 이십 년 만에 처음 이렇게 슬피 운다고 했습니다. 큰 아들 죽었을 때 받았던 비통함과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교...수님도 있습니다. 87년 대선패배에 버금가는 정치적 충격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참으로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국민들께 너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끓어오르는 시대교체에 대한 열망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내고 싶어 하는 간절함을 정치적으로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퇴행하는 것들을, 낡은 세력을, 의롭지 않은 힘들을 바로잡지 못한 채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진정으로 민생을 살리고, 복지를 구현하는 길을 만들려고 했는데 국민들로부터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눈발처럼 흩어져 날리는 열망,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기대와 뜨거움과 간절함들을 바라보며 참으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특히 침묵의 광주를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픕니다. 어떤 말로 그분들의 허탈과 고립과 비애를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하느님이 주신 거라면 받아야 합니다. 승리는 받고 패배는 받지 않겠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상처와 고통을 주시는 분이 영광을 주셨던 그분이라면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프지만 실패든 패배든 있는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인간 세상을 바라보며 하느님은 더 큰 계획을 갖고 계실 겁니다. 저는 그 계획까지를 믿고자 합니다.

 

패배한 자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하느님은 보고 계실 겁니다.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냉철한 분석과 명료한 판단도 많습니다. 감정과 분노가 섞인 글도 넘치고, 비난과 욕설도 많습니다. 정확한 지적도 있고, 차라리 분열하고 망하는 게 좋겠다는 원망도 있습니다. 얼마나 분하고 얼마나 실망스러우면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슬퍼하면서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다수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위로하고 다독이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혜신 박사가 우려했던 대로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절망의 사회가 연장된 게 아닙니까? 실제로 절망한 노동자들이 목숨을 던지고 있지 않습니까?

 

약자와 서민보다 자본의 폭력, 나눔보다 독점, 청렴보다 부패, 유능보다 무능, 정의보다 불의, 민주주의보다 독재세력, 친일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평화와 상생보다 대립과 전쟁과 증오를 부추기는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돌리는 선택을 보고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약자와 서민과 무너지는 영세 상인과 자영업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고자 했는데 그들로부터 외면당했습니다. 그들은 계급투표를 하지 않습니다. 그분들과 5,60대는 경험적 투표, 이른바 휴리스틱스(Heuristics)를 했습니다. 후보를 비교하고 정책을 따져본 정보를 근거로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보고 겪은 자기 경험, 자기 세대의 경험에 의해 판단된 지식에 근거해서 투표할 사람을 정한다는 것입니다.
티브이토론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What)을 말했는가를 중심으로 판단하지만 일반적인 유권자들은 어떻게(How) 느꼈느냐, 왜(Why) 그렇게 느끼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유권자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 감성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후보자 중에 누가 더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느냐도 참으로 중요한데 문재인 후보도 훌륭한 공감능력과 소통능력을 가졌지만 박근혜 후보는 공감을 넘어 동정의 단계까지 가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5, 60대와 노인층, 대구 경북 그리고 부산 경남까지 박근혜 후보를 독재자의 딸로 보기보다 불쌍한 여자로 보는 이들이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정희 후보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박근혜 후보를 공격했을 때 통쾌하기는 했지만, 그 결과 5,60대의 등돌림과 몰표가 만들어지는 게 선거입니다.
지역적으로는 영남이 호남보다 압도적으로 많고, 이념적으로는 보수가 진보보다 훨씬 더 많고, 이제 세대별로도 2,30대는 줄어들고 5,60대가 상대적으로 많아진 구도에서 보수 세력을 이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97년 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김종필과 손을 잡고 겨우 39만 표 차이로 이겼고,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이 57만 표 차이로 이겼지만, 2007년에 질 때는 530만 표 차이로 지지 않았습니까?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지난 총선이나 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선거를 졌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저는 언제든 질 수 있는 쪽은 늘 우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선거가 끝나기 5분전까지도 절박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선거 당일 날 오후부터 얼마나 득의만만했던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민주당이 쇄신하지 않아서 졌다고 보는 분도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친노 핵심인사들이 물러나야 한다고 해서 물러났고, 당 대표와 최고위원 전원이 쇄신 요구를 받고 물러났으며, 이제 원내대표도 물러났습니다. 문재인 후보도 박근혜 후보처럼 국회의원직을 사퇴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요구들이 선거에 이기기 위해 배수진을 치자는 요구였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봅니다.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문재인 후보가 위임받은 당 대표의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거나, 정계 은퇴를 해야 한다거나, 국회의원직 사표를 내라는 요구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책임을 질 수 있다면 그것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 감정적으로 문재인 의원을 흔들거나 흠집을 내고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정치 할 의사가 없는 문재인을 우리가 필요하다고 불러내 그를 우리 진영의 후보로 만들었고 그와 함께 최선을 다해 싸웠고 그리고 패배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를 버려야 한다고 하면 국민들이 우리를 버릴 겁니다. 문재인도 우리의 훌륭한 자산입니다. 저는 문재인과 함께 수구 부패세력과 맞서 싸우는 동안 문재인의 포장되지 않은 모습, 어눌한 진실함이 좋았고, 신뢰할 만한 인간됨, 그의 능력과 성실함, 정의롭게 살아온 그의 인생, 그의 따뜻한 카리스마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가 꿈꾸어 온 이웃 같은 대통령의 모습을 잠시라도 상상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를 미워하는 정치 세력이 문재인에게 책임을 물으면 저는 그게 어떤 책임이든 같이 책임지는 쪽에 서겠습니다. 문재인을 내팽개치고자 하면 저도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문재인의 희망과 절망을 함께 하겠습니다. 문재인의 열망과 좌절, 문재인의 도전과 실패를 함께 하겠습니다. 문재인을 통해 우리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으므로 고통과 시련도 함께 하겠습니다.

 

안철수 후보를 지지했던 분들 중에 실망스러운 마음을 잠시 접고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 준 분들에게도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국민연대에 참여해주셨던 분들, 평생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자기 길을 걸어오며 쌓은 명성과 이름을 기꺼이 빌려주셨던 많은 분들께도 감사와 사죄의 인사를 올립니다. 무엇보다 1,470만 명의 국민들께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규용님이 말씀하신 대로 “보수보다 유능한 진보, 보수보다 실용적인 진보, 그러면서도 멋있고 당당한 진보”가 되기 위해 다시 노력하겠습니다. 젊은 세대들에게 멋진 롤 모델이 되는 진보가 되겠습니다. 내 세계관, 내 아이덴티티를 지키면서 5, 60대에게 어떻게 다시 다가갈 것인가를 고민하겠습니다.
쌓인 눈 위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여러 날 째 죽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견디었습니다. 내일부터는 밥을 먹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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